THE BOX 더 박스 - 컨테이너는 어떻게 세계 경제를 바꾸었는가
IT 의 특정 기술의 의미와 활용 분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업무 도메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docker 같은 컨테이너 기술의 의미와 파급력은 컨테이너의 역사와 산업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다룬 책을 소개합니다.
들어가며
컨테이너 이전에는 화물 운송 비용이 무지 비쌌고 심하면 원가의 25%까지 차지했습니다.
이때문에 운송료를 절감하려고 제조업체는 항구 근처에 공장을 지었고 수출은 그리 타산이 맞는 일이 아니었고 가까운 곳에서 공산품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말콤 맥린이라는 천재 기업가가 선박을 이용한 화물 운송 사업을 “선박의 운행”이 아닌 “화물의 이동” 이 본질임을 꿰뚫고 컨테이너를 표준화하고 최초의 컨테이너 운송을 활성화했습니다.
컨테이너가 도입되고 톤당 5.83달러였던 운송료는 16 센트로 낮아졌고 운송료때문에 가까운 제조업체의 공산품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서플라이 체인이 제조업체의 가장 중요한 역량이 되었고 로컬 제조업은 붕괴되었고 위험하지만 좋은 직업이었던 항구의 하역 노동자 일자리는 컨테이너와 크레인에 밀려서 사라졌습니다.
이 책은 컨테이너의 아버지인 말콤 맥린이라는 천재 사업가와 컨테이너의 역사와 산업계에 미친 영향을 방대한 연구와 자료를 통해 고찰한 흥미로운 책입니다.
금속 상자 이전 선적과 하역
예전에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라는 바닷가 근처의 달동네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다룬 소설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등장인물중 어느 가장의 직업은 항구에서 하역을 하는 인부였는데 보험도 가입되지 않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어느 날 하역 작업중 낙하물에 맞아서 사망하고 보상금을 받아서 남은 가족이 새로운 출발을 했던 내용이 기억납니다.
이렇게 선박에 짐을 선적하고 하역하는 일은 사람이 직접 해야했던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고 반대 급부로 항구의 인부들은 강력한 노조를 조직하고 끈끈한 연대 의식을 갖고 하역 노동자들의 처우와 근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선주의 관점에서 보면 배는 화물을 운송하는 시간보다는 선적과 하역을 위해 항구에 정박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이에 못지않게 잦은 화물의 훼손이나 분실이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1950년대에는 상품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원가의 25% 정도까지 화물 운송 비용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운송료의 상당 부분이 육상 운송에서 출발지 항구까지 옮기고 도착지 항구에서 다시 트럭이나 기차로 옮기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운송료 절감을 위해 공장을 항구 근처로 옮기는 제조 업체도 있었으며 서플라이 체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므로 로컬 제조업체가 비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컨테이너의 아버지
중고 트레일러 운전수로 시작했지만 탁월한 사업 감각을 발휘해서 다수의 트럭을 보유한 장거리 운송 회사로 사업을 키운 성공적인 사업자인 말콤 맥린은 끊임없이 사업 확장을 도모했습니다.
당시 운송 사업은 정부의 규제로 인해 트럭 회사들이 노선별로 나눠 먹고 있어서 경쟁이 없고 매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맥린은 규제로 인해 신규 노선 허가가 어려운 한계를 깨닫고 이를 피하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기존 노선을 갖고 있는 운송업체 매입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제대 군인에게 싼 이자로 트럭을 살수 있게 지원하는 제도를 활용해서 제대 군인들에게 트럭을 사게 한 후에 그들을 입사시켜서 꽤 많은 트럭을 추가로 확보했습니다.
맥린은 강박적일 정도로 원가 절감을 시도했고 공기 저항 감소를 위해 트레일러의 디자인을 바꾸고 화물을 실을 때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고 특정 주유소와 협약하여 연료비를 절감하는등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고 경쟁사보다 낮은 운송료를 고객에게 제시하여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끊임없는 사업 아이디어를 냈던 그는 고속도로 정체 현상을 보고 연안부두를 화물선이 트레일러 트럭을 통으로 싣고 운행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정부와 산업계, 항만을 꾸준히 설득하고 실행해서 최초의 컨테이너 운행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 표준화가 덜 되어 있고 항구에 컨테이너를 선적하고 하역할 설비부족등의 문제로 컨테이너 운송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고 예전에 비해서도 화물 운송 비용들은 그리 줄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전이 발발하고 미군은 군수품을 베트남에 보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깊은 부두도 없었고 낙후된 항구로 인해 배 한대의 하역 작업이 10일에서 심하면 한달까지 걸렸고 미국방부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맥린은 컨테이너가 군수품 조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국방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고 화물 운송 계약을 따낸후에 컨테이너를 적용하기 위해 교전지역이었던 캄란만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화물 처리용 크레인과 접안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한국인 용접공(우리 아버지, 형들이었겠죠)들이 위험 지역에서 목제 데크를 강화하기 위해 열심히 용접을 했다고 합니다.)
컨테이너화 준비를 마친 맥린의 배가 항구에 도착했고 226개의 컨테이너가 15시간만에 하역을 마쳤고 드디어 미군 화물의 적체 현상이 해결되었습니다.
맥린이 컨테이너화를 위해 끈질기게 밀어붙인 추진력과 정열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었고 맥린의 해운사인 시랜드 서비스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마치 맥린이 미국방부의 특혜로 성장한 것으로 보일수 있는데 미 정부는 맥린의 회사가 베트남에서 항구를 정비하고 크레인을 옮기고 터미널을 짓는 비용을 보상해 주지도 않았고 어떤 물적/인적 자원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맥린이 이런 모든 위험과 투자비를 안고 베트남에 진출했고 교전 지역에서 철저한 비용 관리와 리스크 관리를 통해 이익을 낸 것이니 회사를 망하게할 수도 있었던 위험한 도박을 성공한 것입니다.
이후 맥린의 해운 회사는 미국방부와 장기 계약을 따내고 승승장구했고 베트남에 하역한 배가 일본이나 동남아를 거쳐서 화물을 싣고 미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해서 더 큰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특히 성장하고 있던 일본의 가전회사들은 비싼 가전의 훼손이나 분실을 여러 번 겪고 난 후에 컨테이너 운송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호황에서 불황으로
승승장구하던 맥린의 해운 사업은 표준화로 인한 경쟁사들의 등장과 폭발적으로 증가한 컨테이너선들로 인해 운송료 전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맥린은 운송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 빠르고 큰 배를 건조하기로 하고 막대한 대출을 받아서 컨테이너선을 만들고 화물 운송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의 배는 다른 선박보다 빨랐으므로 항구에 더 빨리 도착하고 다음 기착지로 떠날수 있었지만 반대 급부로 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석유 파동이 터지고 많은 연료를 소비하는 배로 인해 대출금을 제대로 갚을수 없을만큼 치명타를 입었고 승승장구하던 맥린의 회사는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경쟁사들도 운송료 전쟁과 석유 파동을 이겨내기 위해 인수/합병을 거듭했고 그 결과 현재는 하파그로이드, 머스크등 소수의 대규모 해운사들만이 남게되었습니다.
현재의 해운 사업은 막대한 대출로 인한 위험을 안고 어마어마하게 큰 컨테이너 선박을 발주하고 인수하여 운항하고 주기적으로 경쟁 업체와 운송료 전쟁을 치러야하는 위험하면서 고도의 금융 기법이 필요한 특이한 산업군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정부가 다 노선을 정해주고 경쟁없이 각자의 노선에서만 수송하면 됐던 꿀빨던(?) 업종이었습니다. 대신 전쟁등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선박은 징발이 가능했었고요.
P.S
- IT 쪽에서도 컨테이너의 아이디어를 적용해서 docker 같은 제품이 발표되고 개발과 운영의 흐름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IT 컨테이너를 활성화 시킨 docker는 정작 container orchestration 전쟁에 져서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 최초의 컨테이너 운송을 시작한 말콤 맥린의 시랜드 서비스 사는 99년에 머스크에 팔렸고 "머스크 시랜드(Maersk Seaaland)"로 사명이 변경되었다가 2006년에 "머스크 라인(Mearsk Line)" 으로 변경되었습니다.
- 미국의 거대 담배 회사인 레이놀즈(Reynolds)는 넘쳐나는 현금으로 새로운 투자처를 찾다가 맥린의 시랜드에 $145 million 이라는 거액을 투자했습니다.